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평가 (문단 편집) ==== [[바그라티온 작전|바그라티온 재앙]] ==== 히틀러는 1942년말~1943년초 스탈린그라드는 물론, 1944년초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후퇴 불허, 진지사수명령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고도[* 그나마 뒤늦게나마 만슈타인의 재량으로 병력은 상당수 살려냈지만 알토란같은 기갑장비들은 대다수 버리고 후퇴해야했다. 그리고 인명 구출도 기존의 인명피해보다 적었다는 것이지 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는 참사였다.] 히틀러의 진지사수명령, 기동방어를 위한 후퇴불허라는 사~~망~~상(?)은 굳건했다. 당시 소련군은 233만 명. 독일군은 85만 명이었다. 3:1이 조금 안되는 병력비였는데, 독일군은 수비측의 입장이었고 독일군은 독소전쟁 이래 1945년을 제외하고 소련군보다 우세한 교환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간섭 없이 싸웠더라면 소련군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도 있었다. 비록 기동력의 차이로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소련의 [[T-34-76|T-34]]는 공방능력에 있어서는 티거나 판터에 못미치고 4호 전차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전략적 기동성은 당대의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한 장비였다. 게다가 독일군은 수송량의 절대다수를 말에 의존한 반면에 소련군은 차량을 이용했다. 말과 차량의 기동력 차이는 명백하다.] 1. 효율적인 방어를 하려면 병력을 방어가 용이한 곳 위주로 배치해야 하는데, 방어거점이 아닌 행정거점에 병력을 다수 배치했다. 2. 수적으로 열세인 독일군이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려면 기동방어는 필수였으며 기동방어를 위해서라면 2보전진을 위한 1보후퇴, 즉 일시적인 후퇴는 불가피한데, 1cm의 영토도 내주기 싫어하는 히틀러는 6월 말~7월 내내 사실상 기동방어를 거의 불허했다.[* 8월에 뒤늦게 발터 모델이 기동방어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독일군은 입은 피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승기는 진작에 소련군이 잡은 상태였다.] 3. 바로 위에 언급한 대로 기동방어를 안 하니 수적으로 열세인 병력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련군은 총 전력의 우세뿐 아니라 몇몇 곳을 집중타격해서 쌈싸먹기 각개격파를 하거나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니 실제로 전투를 할 때는 3:1정도가 아닌 10:1 이상의 병력비도 나오곤 했다. 1944년 6월말 시점의 독일군은 전성기보다는 크게 약화되어있었으며 이미 승리는 소련에게 완전히 기운 상태였지만[*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면서 독소전의 무게추는 완전히 소련 쪽으로 기울었다.] 히틀러와 최고사령부의 삽질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독일에게 악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의 반격 국면 당시엔 소련군 4 : 독일군 1 정도의 교환비를 냈었는데, 바크라티온에서는 소련군 : 독일군의 교환비가 1(18만) : 1.39(25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전사 및 실종자만 집계한 수치. 포로와 부상자를 전부 집계하면 소련이 77만 명, 독일이 60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중부 집단군의 상황은 기동방어를 수행하는 것조차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는데 3기갑군은 [[홍철 없는 홍철팀|이름과는 달리 예하에 기갑부대를 편제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소련의 기만책에 낚인 독일군 사령부가 56기갑군단을 다른 지역으로 배치하는 삽질까지 겹치는 등 히틀러가 아니라도 이미 충분히 망할 상황이었다. 1943년의 소련군은 이미 누룽지 긁듯이 인구를 박박 긁어서 최대로 징병한 병력이 670만 명이었는데, 쿠르스크 전투 손실 85만 명, 쿠르스크 이후 반격에서 60만 명 이상 손실(류만체프, 쿠트죠프), 드네프르강 도하 전투로 최소 40만 명 이상 손실(최대 120만 명까지도 추산)으로 1943년에만 200만 명은 족히 사상자가 발생했고, 1944년 1월~3월 남부 우크라이나 공세로 110만 명 사상자 손실, 1944년 6월~8월 바크라티온 작전 손실 77만,[* 이는 사수명령으로 60만 명의 독일군이 77만 명의 소련군 사상자를 내고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잡히게 된 이유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군과 독일군의 기동력 차이로(소련은 랜드리스로 받아온 차량을 이용한 반면에 독일은 말을 이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발트공세 27만 명 손실에다가(1944년 9월~11월) 1944년에도 최소한 214만 명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다. 즉, 1943~1944년 2년간 최소한으로 잡아도 소련군은 414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소련군이 전체 640만 명을 넘는 병력을 유지했던 것은 점령되었던 영토의 탈환을 통한 추가적인 징병과 부상자의 복귀 덕분이다. 히틀러가 뻘짓 안 하고 정상적인 작전운용이 가능했다면 1943~1944년 2년간 소련군의 손실은 실제 발생한 414만 명보다 훨씬 더 커졌을 것이고 드네프르강 라인을 유지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계속 독일이 쥐고 있으면 실제 역사에서 이루어진 영토 회복 후 마구마구 징집해서 벌충도 불가능하다.[* 드네프르 서안 우크라이나 인구만 해도 족히 2500만 명은 되고, 벨라루스도 거의 1000만 명 정도였으니 여기서 러시아 본토 식으로 10% 이상 징병하면 최소가 350만 명이다.] 문제는 히틀러가 뻘짓을 안 했어도 이미 전세는 소련이 우위였을 것이지만. 물론 덕분에 병력 손실을 훨씬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히틀러의 삽질인 건 맞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